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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군 유래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연재(도안면) 2탄

서브비쥬얼 이미지

도안면은 금강과 한강의 수계에 위치하여 강가를 중심으로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기좋은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 송정리에는 고인돌이,광덕리에는 선돌이 있어 선사시기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문화적배경 기원

선사유적으로 송정리고인돌, 광덕리선돌 등이 있으며 성곽유적으로 이성산성, 두타산성이 불교유적으로 광덕사, 광덕사 석조여래입상이 유교유적으로 정후사, 구암서원, 기성전, 연종록부부 정효각, 곡산연문 쌍효각, 곡산연문 효열각, 김창익효자각, 강릉유문 쌍열각등이 있다.

 

도안면 HISTORY

2003. 08. 30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개청

1991.02.01

충청북도 증평출장소 도안지소

1914.04.01

괴산군 도안면(화성,도당,석곡, 광덕,송정,노암,연촌 등 7개리)

1910년

청안군 북면

1895년

청안군

조선태종 13년(1413년)

청안현(청당현/도안현 병합)

고려태조 23년(940년)

청주목 도안현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흑양군 도서현

고구려 장수왕 63년(475년)

들노군 도서현

 

화성1리 마을전경

화성리는 구화리(九花里)와 설도리(城都里)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도안하면 화성리를 의미한다. 마을 뒷산에는 진달래꽃이 만발해 화산(花山,꽃산)을 이루었다고 전하며 마을 앞 개울가에는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고, 앞에 흐르는 맑은 물은 지나가는 길손들이 한번 쯤 취흥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던 마을이 었다.

<도안현(道安縣)>
본래 고구려의 도서현(道西縣)인데,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도서(道西)로 고쳐서 흑양군(黑陽郡:진천군)의 속현이 됐다가, 고려 초에 도안(道安)으로 고쳤다.
그후 제8대 현종9년(1018)에 청주에 붙었다가, 조선 제3대 태종5년 청당(淸塘)과 도안의 두 고을이 좁고 백성이 적으므로 하배 청안(淸安)으로 고치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또한 태종 13년 읍내 . 동 . 서 . 남 . 북 . 근서면의 6개 면을 관할했는데, 1914년 군 . 면 폐합에 따라 서면은 청주면에 편입되고 그 나머지 5개 면은 괴산군에 편입돼 괴산군의 청안, 증평, 도안의 3개 읍 . 면과 청원군의 북이면 일부와 오창면의 일부지역이 됨.

토박이땅 이름

  • 구궁정 : 서도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귀봉정(歸鳳亭)이 있었다 함.
  • 성도리(城都里) : 위작다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성산에 성을 쌓고 이곳에서 군사를 훈련시켰다고 함.
  • 작다리(作多里) : 명암 북쪽에 있는 마을로 위작다리와 아래작다리로 불리워짐. 곡산연씨 종중에 서 연주운이라는자가 사마시에 합격. 진사 작위를 받아 살고 있었다 하여 아래작다리라고 부름.
  • 행정(행화정:杏花亭 ,역전) : 도안역이 소재한 마을로 살구나무정자가 있었음.
  • 비석촌(碑石村) : 본래 구궁정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었으나 현재 가옥은 없고 농경지로 됐음. 이곳에 비문 없는 비가 한개 있었으나 1941년 수해로 매몰됐음.
  • 서당골 : 화성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전에 서당이 있었음.
  • 쌍둠성(쌍정 : 雙井) : 역전 마을 동쪽 하천 건너 쌍버들나무거리 옆에 있던 쌍 둠벙. 그러나 1941년 수해로 둠벙이 묻혔음.
  • 행정고개 : 행정 뒤에 있는 고개, 노암리로 넘어 감.
  • 옥고개(옥현 :獄峴) : 명암리 행화정에서 증평 진모랭이들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 이 곳에 감옥이 있었다 함. 비석촌(碑石村) : 본래 구궁정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었으나 현재 가옥은 없고 농경지로 됐음.

 

노암1리 마을 전경

노암리는 본래 청안군 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상리, 백암리, 신곡리, 대지곡리, 노하리 일부를 병합해 노상고 백암의 이름을 따서 노암리라 부른다.

노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은 뇌실인데, 뇌실 북쪽에는 현재 청주한씨 종산인 작은 언덕산이 있다. 청안군 북면으로 있을 때의 장터라고 전하며 지금도 이곳을 장터라고 부른다.
마을 앞에 축성된 뇌실 방죽은 1938년에 시설했고, 방죽 옆에는 연자 방앗간이 있었다. 만뎅밭골로 넘어가는 등성이에는 수령400년 가량되는 참나무가 있어 마을 처녀들이 동아줄을 매고 그네를 뛰었다고 전한다.

토박이땅 이름

  • 괴정(노하리) : 뇌실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느티나무 정자가 있음.
  • 노상리 : 뇌실 위쪽에 있는 마을.
  • 뇌실(노곡 :老谷 , 신명 :新明) : 노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옛날에는 노나라 임금이 사시던터 같다 하여 노실 이라고도 했다하며 해방 되면서 신명이라고도 부름.
  • 뱀티 :(백암 :百岩) : 뇌실 남쪽 긴등성이에 있는 마을.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가 하얀빛을 띠고 있다하는데 바위는 현재 숲에 가려 보이지 않음.
  • 진등(珍登, 신곡:新谷) : 뇌실 남쪽 긴 등성이에 있는 마을로 원래 행갈에 속했으나 여기에서 분리돼 나오면서 새마을 이라하여 신곡이라고도 부름.
  • 행갈(황포 :黃蒲 ,黃蒲洞) : 백암 남동쪽에 있는 마을, 마을 복판으로 개울이 흐름.
  • 괴정저수지(오리샘) : 괴정 서남쪽에 있는 못으로 이곳에 오리가 많이 온다 하여 오리샘이 라고도 함. 1952년 8월에 착공해 1957년 11월에 준공됨.
  • 기성사(,기자묘 :箕子廟) : 황포동에 있는 기자의 사당. 주 한씨 한응각(韓應珏) 옹이 평양에 있는 기자의 영정을 복사해 이곳에 봉안하고 해마다 봄·가을로 제사를 지냄.
  • 연화사 : 노암리 405번지에 있는 절. 벼루재 저수지 옆에 있다.1956년 김임순이 유산을 기증해 지음.
  • 뱀티고개 : 뇌실과 뱀티 마을 사이에 있는 산으로 긴 뱀이 개구리를 쫓는 형이라하여 장사 축와형(長蛇逐蛙型)으로 산소에서 썩은 물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함. 풍수에 형국을 중요시하는 것은 혈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풍수에서 좌청룡은 장손을 뜻하고, 우백호는 지손을 뜻한다. 풍수랑 자연을 손상시키지 않고 자연을 최대로 이용하는데 있어 마치·벌이 꽃을 상하지 않고 꿀만 따 가듯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 능골 : 옥고개와 포수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능(陵)이 있었다함. 현재 밭가에 망두석 1개가 있음.

 

연촌리 마을 전경

연촌리는 본래 조선시대 때 청안현 북면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정조 13년(1789)에 간행된『호구총수(戶口總數)』기록에는 충청도 청안현 북면에 33개 의 동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연촌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연치리(硯峙里) 1개리가 있었다. 그 뒤 연촌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 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 면인 읍내면(邑內面), 동면(東面), 남면(南面), 북면(北面), 서면(西面), 근서면(近西面)중에서 북면(北面)에 속하는 지역이 됐다. 1912년에 간행된『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에서도 당시 청안군 북면은 33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점촌리(店村里)가 새로 생겼다.

1914년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면의 연치리(硯峙里), 점촌리(店村里) 일부를 병합하여 연치리와 점촌리의 이름을 따서 연촌리라 하고 괴산군 도안면에 속하게 됐다.

광복 이후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고, 동년 11월 17일 법률제8호로써「지방 행정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공포됨에 따라 괴산군 도안면 연촌리가 됐다.

1990년 12월 31일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 괴산군 도안면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연촌리는 도안지소(道安支所)행정구역에 속하게 됐다.

2003년 8월 30일 법률 제6902호『증평군설치에 관한법률』에 의거 증평군이설치되므로 증평군 도안면 연촌리가 됐다.

연촌리 마을은 1985년 원남 저수지가 완공되면서 마을과 도안초등학교 연촌분교 등이 수몰됐다. 이로 인하여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도안, 증평, 청주 등지로 떠난 상태로 현재는 세가구 6명 만이 거주하고 있다.

토박이땅 이름

  • 외연(外硯, 바깥벼루재) : 벼루재 바깥쪽(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마을이다. 현재는 1985년에 만든 원남저수지로 인하여 수몰됐다.
  • 내연(內硯, 안벼루재) : 벼루재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마을이다. 연촌리에서 가장 컸던 마을로 현재는 1985년에 만든 원남저수지로 인하여 수몰됐다.
  • 점촌(店村) : 1912년에 간행된『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에 점촌(店村)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12년 경에 새로 만들어진 마을로 보인다.
  • 연현(硯峴, 벼루재) : 노암리에서 연촌리 사이의 고개다. 연촌리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송정리 마을 전경

송정리는 면적9.8km2로 칠송과 소강정이 이름을 따서 송정리라 부르며 자연촌으로 통미, 소정강, 월강, 입장, 전당 등이 있다.

토박이땅 이름

  • 통뫼(칠송 :七松) : 송정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갈골들에 있던 마을인데 무술장마로 마을이 수몰돼 지대가 높은 현 위치로 옮겨 살았다고 전하며 통뫼산에는 일곱 그루의 노송이 있어 칠송마을로 불러오다가 도사의 말에 따라 통뫼(통미)로 불리우게 됐다.
  • 소강정(小江亭) : 칠송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흐르는 물이 맑았다고 함.
  • 월강(月江) : 소강정 동쪽에 있는 마을로 산 지형이 누에 모양을 하고있다. 마을 앞에 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에 비친 달빛이 매우 밝았다 함.
  • 가무지(歌舞地, 전당 :錢塘) : 도안초교, 면사무소, 도안지서가 있던 전당마을로 마을 뒤에 샘물은 수량이 풍부해 마을 전체가 먹고도 남았다고 한다. 또 옛날 이곳에 주막이 많아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이 많아 가무지로 이름이 붙여졌다고 구전됨.
  • 가정골 : 소강정 서쪽에 있는 마을. 현재는 집이 없고 농경지로 돼있음.
  • 입장(立長) : 칠송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 뗏집거리 : 전당 마을 북쪽 도안교를 지나면 큰 무덤이 있는 산이 국도변에 있고 해방 전까 지만 해도 4~5가구가 있었음. 그런데 이들 집은 때로 토담을 쌓아서 지었다 함.
  • 개바위골(구암 :狗岩) : 입장 마을에서 송정저수지에 이리는 골짜기로 바위가 개처럼 생긴 것이 있다 함.
  • 칠으물들 : 통미와 노암4리 사이에 있는 들로 칠으물들과 연암들이 있음.
  • 다락고개 : 입장에서 동남쪽 통미 구레들로 가는 낮은 고개. 현재는 밭.
  • 데시렁이들 : 전당과 괴정 사이에 있는 들.
  • 비링이들 : 소강정 마을 서쪽에 위치한 메마른 들로서 봉천답이라고 유래돼 왔으나 현재는 저수지 시설로 수리안전답이 됐음.
  • 절터골 : 입장 마을에서 송정저수지를 거쳐 원남면가 경계를 이루는 골짜기로 옛날에 절이 있었다 하는데 지금도 절터를 뒤지면 빈대 껍질이 남아있다고 구전되며 빈대가 많아 절을 없애고 이사했다 함.

 

광덕1리 마을 전경

광덕1리  곡산연씨 연민회에 의해 처음 이루어진 마을

마을서쪽에는 북쪽 백마령에서 발원한 문암천이 남쪽 보강천으로 흐르고 있다.마을의 앞쪽과 서쪽 개천을 끼고 기름진 논과 밭이 펼쳐져 있다.

구계마을

 

석곡1리 마을 전경

석곡리(石谷里)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북면(北面)에 속해 있었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간행된『호구총수(戶口總數)』기록에 현재의 석곡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광암리(廣巖里), 백곡리(柏谷里), 지곡리(池谷里), 석화리(石花里), 진암상리(鎭巖上里), 진암하리(鎭巖下里)등 6개리가 있었다. 그 뒤 석곡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 면인 읍내면(邑內面), 동면(東面), 남면(南面), 북면(北面), 서면(西面), 근서면(近西面)중에서 북면(北面)에 속하는 지역이 됐다.

1912년에 간행된『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에서도 당시 청안군 북면은 33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광암리(廣巖里)가 광암리(光岩里)로 바뀌었으며, 진암상리(鎭巖上里)와 진암하리(鎭巖下里)가 진암리(鎭岩里)로 합쳐졌다.

1914년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면의 광암리(光岩里), 백곡리(柏谷里), 지곡리(池谷里), 석화리(石花里), 진암리(鎭岩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석화리의 석(石)자와 백곡리의 곡(谷)자를 따서 석곡리라 하고 괴산군 도안면 행정구역이 됐다.

광복이후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고, 동년 11월 17일 법률제8호로써「지방 행정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공포됨에 따라 괴산군 도안면 석곡리가 됐다.

1990년 12월 31일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 괴산군 도안면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석곡리는 도안지소(道安支所)에 속하게 됐다. 그리고 2003년 8월 30일 법률 제6902호『증평군설치에 관한법률』에 의거 증평군이 설치되므로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가 됐다.

토박이땅 이름

  • 석화리(石花里) : 석화리라는 지명은 정조 13년(1789)에 간행된『호구총수(戶口總數)』에 석화리(石花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1912년에 간행된『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에도 석화리(石花里)라는 지명이 나와 있다.
  • 백곡(栢谷, 텃골) : 백곡리라는 지명은 정조 13년(1789)에 간행된『호구총수(戶口總數)』에 백곡리(柏谷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1912년에 간행된『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을 살펴보면 백곡리(栢谷里)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 후동(後洞, 뒷골) : 후동 마을은 마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본래 있던 마을의 뒤에 위치하여 만들어진 마을이다. 이 마을은 돌꼬지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하여 생긴 마을이다. 후동 마을은 언덕 너머에 있는 산우물 마을과 밀접하게 연관있는 마을로 실제로 거의 붙어 있다. 뒷골이라는 마을이름 역시 산우물 마을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뒤에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뒷골이라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 풍동(風洞, 바랑골, 반용동) : 이 마을은 현재 바람골이라 하여 한자로는 風洞이라 하지만, 그 유래는 불분명하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이 동네는 본래 반용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주변 지세가 용(龍)의 기운이 서려 있는 형세를 하여 반용골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언제부터인지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하여 바람골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 산정(山井, 산우물) : 산우물 마을은 애국지사 연병호 선생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 이름과 관련된 우물이 연병호선생 기념관 가장자리에 두 개가 있다. 이처럼 산 위에 우물이 있어서 마을의 이름도 산우물이라고 유래됐다. 그 중 하나가 연병호선생의 생가 뒷산아래 있는 옻샘이다. 이 샘은 지금도 물이 솟아나 샘을 이루고 있지만, 기념관 건립으로 인해 오염되어 있어 실제로는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 물은 유난히 차가워 무더운 여름철 땀띠가 나더라도 이곳에 와서 목욕을 하면 금방 나았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옻샘에서 약 2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샘은 오도샘이라고 불리는데, 현재는 석곡1리 상수원으로 사용되고 있어 샘의 본래 모습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이 샘역시 옻 샘과 마찬가지로 수량이 풍부했다고 한다.
  • 양촌(陽村, 양지말) : 보강천 다리를 건너 곧게 난 길을 따라 가다보면‘아벨정밀’이라는 공장이 나온다. 이 공장을 지나면서 길은 오른쪽으로 곧게 뻗은 농로는 사리면으로 가는 포장도로와 만나게 된다. 이 길을 따라 논이 길게 이어져 있다. 이 논 너머로 나지막한 야산이 반산이다. 이 반산을 끼고 형성된 마을이 양지말과 턱골이다. 턱골로 들어가는 길은 양지말을 오른편으로 두고 언덕을 따라 작은 오솔길이다. 오른편으로는 낮은 언덕을, 왼편으로는 산 사이 좁은 밭을 끼고 꼬불꼬불한 길을 따르다 보면 고개 너머 마을이 나타난다 이 마을은 논농사를 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턱골 마을의 북쪽 등성이 너머에 반지울이라는 자연 마을이 있다. 과거에는 서너집이 있었으나 현재는 단 한 집만 살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폐가가 돼 없어졌다.
  • 진암(鎭岩) : 진암리와 관련된 지명은 정조 13년(1789)에 간행된『호구총수(戶口總數)』에 기록되어 있다. 1912년에 간행된『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을 살펴보면 진암상리(鎭巖上里)와 진암하리(鎭巖下里)가 합쳐져서 진암리(鎭岩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당1리 마을 전경

도당리는 면적이 3.82㎢로 도암리(道岩里,막골)와 금당(金塘)의 이름을 따서 도당리라 부르며 금당은 도당1리,막골은 도당2리, 은행정은 도당3리로 부른다. 

토박이땅 이름

  • 금당(金塘) : 막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청안현과 보강천이 합수되는 안쪽에 있어서 섬처럼 됐으므로 조선조 때 귀양지가 됐었다. 옛날부터 이곳에 서원이 있었으며 마을이 부유하고 번창했으나 마을에 화재가 자주 일어나서 마을 가운데에 연못을 파니 그 후로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 함
  • 막골(도암:道岩) : 은행정 서쪽에 있는 마을. 마을 앞산에 넓고 큰 바위가 있었는데 여기서 글도 배우고 학동들이 놀기도 했다고 한다. 칠보산맥이 이곳에서 그쳤기 때문에 막골이라고 부른다. 마을 뒷산은 매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 매봉산이라 부른다.
  • 도토성(都土珹) : 막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이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현재는 한집만 남아있다.
  • 은행정(銀杏亭) : 도당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서쪽으로 수재산, 북쪽으로 수성산 이 있고, 수성산에는 퇴뫼식 토성이 있다. 주변에 풀무골, 서당골, 성물제 등의 이름이 있고 마을에 700년 수령을 가진 은행나무가 있다.
  • 좌실(佐實) : 금당 동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옛날 이 마을에 좌승(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던 밀직사의 정3품 벼슬)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 주막거리 : 좌실 앞 국도변에 5~6km로 형성된 마을로 현재는 없어졌다. 옛날 괴산에서청주로 가는 길목으로 나그네에게 술을 팔던 주막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
  • 시드물 : 금당 앞에 있는 들로 물이 귀해서 붙여진 이름.
  • 수재산 : 금당 동쪽에 있는 해발 197m 산.
  • 수성산(壽城山) : 은행정 뒤에 있는 산으로 이 산에 토성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현재도 자취가 남아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