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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란 초대전, 네오아트센터 1주년 기념 개인전

소영란 초대전, 네오아트센터 1주년 기념 전시회

청주시 수암골에 갤러리가 생기며 문화 공간으로서 새로운 랜드마크로 유명세가 될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지 1년이 되었다. 그 주인공인 네오아트센터 1주년 기념 초대전으로 소영란 화백의 전시장에서 작가를 만났다. 

작가는 영월에서 출생, 회화를 전공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작가로서 작업을 이어 왔다 1996년에 청주시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인 작업은 2002년부터 자택에서 작업을 하였다. 전업작가로서 21회의 개인전과 11회의 부스전 실적이 말해주듯 부지런한 작가임이 틀림없다. 최근엔 충북문화재단, 시립미술관 등 지원 초대전에 전시하게 되었다. 

촉발affect이란 제목으로 초대전을 개최 되었다. "누구에게나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라고 소 제목을 썼다. 예정 되어 있지 않은 불연듯, 긴장감, 동적, 드라마틱 이미지 와 에너지로 작업을 진행 한다고 한다. 자연을 소재로 색상도 쓰여진다. 향후 자아의 순수와 내면의 세계를 탐구하는 작품을 그려 보겠다 한다. 현재까지 자연에서의 작품세계를 한의정(미학, 충북대학교 교수)​평론가의 '정동의 풍경'이란 청주시립미술관 전시 평론을 캡처하여 게재해 본다.

 

정동(affect)의 풍경

‘피토레스크(pittoresque)’라는 프랑스어는 ‘그림이 될 만한’, ‘회화적인’, ‘그림과 같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그림’은 17세기 로마에서 활동했던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의 풍경화에 나타나는 목가적이고도 이상적인 풍경을 가리킨다. 클로드의 풍경은 그의 사후에도 굉장한 인기를 누렸고 18세기 영국에서는 클로드의 풍경을 본떠 스토어헤드(Stourhead) 공원을 만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림을 본떠 만든 이 공원 안을 거닐면서, ‘픽처레스크(picturesque)’, ‘그림 같은’ 풍경이라 감탄했다. 이처럼 우리는 으레 ‘그림 같은 무엇’이라고 말할 때 이상적인 그 무엇을 기대한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말이다. 어떤 풍경을 보고 ‘그림 같다’고 한다면 낙원 또는 천국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즉, ‘그림 같은 풍경’은 비현실적인,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클로드 로랭은 실제로 풍경을 그릴 때 특별한 장치를 사용하여 자연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 장치는 코팅된 흑색 볼록 거울이었는데, 이 거울을 통해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흐릿한 초점 아래 전체적으로 낮은 톤의 칼라로 보인다. 유리를 투과하면서 부드럽고 그윽한 색채를 입은 자연은 그대로 클로드의 화폭에 ‘그림 같은 풍경’으로 재현되기에 적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클로드의 유리를 통해 본 자연이나, 픽처레스크 풍경(화)는 사람들을 한 걸음 물러 서 있게 만든다. 이 이상적인 풍경은 멀리서 감상하기에는 좋지만, 사람들은 섣불리 그 풍경 안으로 들어가 직접 체험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지 않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꿈같은 풍경은 ‘감상’의 대상이지 ‘체험’의 대상이 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소영란의 풍경(화)는 이러한 ‘픽처레스크 풍경’과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한다. 소영란의 풍경은 체험의 풍경이며, 화가도 관객도 그 풍경 안에 들어가도록 끌어당긴다. 그렇다고 그녀의 풍경이 그림 같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영란의 풍경은 너무나 ‘회화적’이다. 이때 ‘회화적’이란 표현은 앞서 사용한 ‘피토레스크’, ‘픽처레스크’보다 독일어 ‘말러리슈(malerisch)’로 표기하는 것이 적확할 듯하다. ‘말러리슈’에서 말(mal)은 얼룩을 의미하는 독일어 ‘마퀼라(Macula)’에서 파생하였다. ‘마퀼라’에서 ‘그리다’, ‘색칠하다’라는 동사 ‘말렌(malen)’, 그리고 ‘화가’를 뜻하는 명사 ‘말러(Maler)’가 나왔다. 그래서 ‘말러리슈’는 그림과 관련된 형용사로 쓰이기도 하지만, 보다 자유로운 그리기의 특징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ölfflin)이 이러한 의미로 말러리슈를 사용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르네상스의 ‘선적(線的, linear)’ 양식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바로크 양식의 ‘말러리슈’적인 특징을 나열했는데, 이는 명확한 윤곽보다는 변화하는 색채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열려 있는 동적(動的) 형태가 전체적이고 통일적인 분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소영란의 출렁이고 일렁이는 풍경 앞에 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풍경이 무척 회화적, 말러리슈하다는 필자의 표현에 쉽게 동감할 것이다.

 

소영란의 대형 캔버스에는 많은 선과 획이 가로지르고 있지만, 그 풍경은 선적(linear)이지 않고 회화적(painterly, malerisch)이다. 작가의 몸짓 또는 손짓의 방향과 강약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명확한 자국을 남기는 선들이지만, 이 선들이 닫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각 캔버스의 틀 안팎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선들은 식물을 이루다가 어느새 호수의 물결이 되고, 봄의 버들가지처럼 살랑살랑 흔들리다가 화염 불꽃처럼 솟구쳐 올라간다. 소영란의 캔버스에서 선은 단순히 자연을 재구성하고, 그 외관을 모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들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또는 보이는 것 이면에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시화하는 역할을 한다. 자연에 깃든 ‘생의 약동(elan vital)’, 또는 자연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들, 그 사이에 주고받는 힘과 에너지가 그려진다. 그러나 아마도 소영란의 풍경에서 가장 먼저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선들의 움직임보다 색의 강렬함일 것이다. “색채야말로 사물의 심장”이라고 말한 파울 클레(Paul Klee)의 말처럼, 물, 풀, 땅, 꽃, 나무 등 모든 사물들(things)의 약동하는 심장 박동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선택된 색들의 연속이다. 색면들이 중첩되면서 앞뒤로 움직이는 듯 유동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여백으로 남은 빈 공간들, 그리고 강한 스트로크들이 겹쳐진다. 색들은 이미 완성된 자연의 외양(appearance)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이 자연들이 생성되어 우리 눈앞에 나타나고 있음(appearing)을 보여준다. 자연이 우리의 가시계에 들어오는 과정, 또는 우리의 몸을 관통하며 감각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 소영란은 작업실 근처 대청호 지역을 산책하면서 자연을 관찰하고 작업의 영감을 얻지만, <Floating> 연작에 묘사된 자연이 반드시 몇 월 며칠 작가가 만난 대청호 주변의 ‘기록’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저 산책 중 만난 자연의 색깔을 ‘채집’하고, 자연과 마주침에서 경험한 감각들은 작가의 몸에 누적된다. 그리고 이후 작업실에서 텅 빈 캔버스를 마주하면서 떠오르는 자연의 이미지를 ‘기억’해내며 작가는 몸에 축적된 감각들과 지금 여기(hic et nunc)의 감각과 결합시킨다. 그러므로 캔버스 위 자연의 형상들이 가까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대청호 풍경이겠지만, 때로는 심연의 것도 끌어오기 때문에 작가가 유년기를 보낸 강원도 동강의 이미지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작가가 자연사물들과 마주친 수많은 사건들 이후에, 사후적(事後的)으로 새롭게 구성되고 해석된 이미지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풍경이 현실 자연의 언제, 어디와 일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작가가 마주했던 자연의 당시 이미지가 작가의 몸과 마음을 통과하면서 캔버스에서는 다른 감각의 풍경으로 나타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현실 자연과 다른 풍경은 클로드의 풍경처럼 이상화된 자연도, 필터를 통해 보는 것처럼 모호한 화면도, 고요하고 정적인 상태도 아니다. 오히려 이 풍경은 실제 계절색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선연한 빛깔을 발산하며, 모든 것들이 살아 움직이며 서로 관계 맺고 살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풍경은 객관적 풍경도, 주관적 풍경도 아닌 ‘정동의 풍경’이다. 정동(情動, affect)은 접촉해서 흔적을 남긴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 ‘아펙투스(affectus)’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다시 말해서, ‘정동’은 정서나 감정의 차원을 넘어 몸과 몸을 관통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효과를 만들어내는 경험의 강렬함을 내포한다. 최근 많은 이론가들이 ‘정동적 전회(affective turn)’라 칭할 만큼 이 정동 개념에 대해 제각각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정동은 우리의 ‘의식화된 앎’과는 전혀 다른, 우리가 알 수 없는 ‘힘들’이라는 것이다. 정동은 영향을 주고 받는 힘들의 우연한 마주침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소영란이 자연에서 생동하고 약동하는 생명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녀의 몸과 자연세계 사이에서 발생되는 정동은 관념이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작가가 캔버스에 자연과의 마주침을 그리려 할 때, 그녀의 손과 붓을 움직이는 힘이 바로 이 정동이다. 그리고 정동은 힘들이나 강도들(intensities)의 이행이기 때문에, 감각적이고 집합적인 강렬한 흐름으로 표현된다. 소영란의 풍경에 휘몰아치는 선과 색의 스트로크가 반복되고, 역동적인 색면과 다양한 층들이 중첩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렇게 (정확히 알 수 없어) 추상적이고 잠재적이었던 정동이 캔버스 위에서 작가의 손짓을 매개로 강렬한 파동으로 현실화된다.

 

소영란이 인체 크로키 작업을 계속 해 온 것도 의식에서부터 벗어나 정동이 작동하도록 하는 훈련이다 – 작가는 이것이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그리기 위해, ‘직관을 그리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 인체 크로키에서 훈련된 선긋기의 속도, 색 선택의 자발성이 자연을 그릴 때도 반영되게끔 훈련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익숙한 선, 인지된 색, 체득화된 형태가 나오기 시작하면 그녀는 크로키도, 회화도 잠시 멈춘다고 했다. 소영란은 철저하게 자신의 앎과 습관의 틀에서 벗어나 선과 색이 자유롭게 움직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칸트 식으로 이야기하면 무목적성의 그림이고, 들뢰즈(Gilles Deleuze)의 용어를 빌리자면 비인격적 풍경이다. 선과 색이 형상 구성의 목적과 인간 사유의 틀을 떠나 자유롭게 이동하며 서로 결합하고 다양한 조합들을 만들어낸다. 소영란이 자연세계 중에서 특히 물을 배경으로 하는 이유도 물이라는 공간이 최대한 다양한 조합을 산출해 낼 수 있는 잠재성의 평면이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호수, 강변과 같은 물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한계가 없는 공간으로 지각한다. 길이 나 있고, 오름과 내림이 있는 땅과 달리, 투명하고 매끈해 보이는 물의 표면은 한계가 없어 거기에서는 수없이 다양한 생성이 일어날 수 있다. (들뢰즈는 ‘홈 패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 중 후자에서 창조와 생성이 발생한다고 했다.) 끊임없이 출렁이고 일렁이는 물의 표면은 계속해서 새로운 생성들(becomings)의 다양한 배치(agencement)를 가능하게 한다. 물 안과 밖이라는 경계를 떠다니면서 색과 선은 결합과 분리에 있어 더욱 자연스러움과 자유를 보장받는다. 색과 선, 색과 색, 풍성함과 여백, 차가움과 따뜻함, 강렬함과 고요함 등 수많은 조형적 요소들은 여기서 더 많은 결합(assemblage)을 시도할 수 있다. 조형요소들은 소영란의 화폭에서 부레옥잠처럼 수면을 떠다니다가 꽃을 피우고 하루 만에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또 다른 생성을 향해 꿈틀꿈틀 전진한다.

 

소영란이 물 표면의 경계만 그리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땅 속의 경계를 표현하고 싶어 거대한 뿌리를 그렸다. 땅 속 경계를 나누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뿌리는,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제각각의 리듬과 약동을 지닌 각기 다른 생명체로 보이기도 한다. 이 화폭을 그대로 180도 뒤집으면 부채꼴로 뻗어 자라고 있는 나무 가지로 보일 것이다. (실제 소영란은 전시 설치를 할 때, 심지어 전시 중에도 벽에 걸린 캔버스를 180도 뒤집어 전시하거나, 연작의 조합 순서를 바꾸어 걸기도 한다. 그만큼 관객들이 그녀의 풍경 앞에서 자신만의 풍경을 기억해내고 소통을 만들어가길 원하는 것이다.) 뒤집어진 뿌리는 이제 나무가 되어 각기 다른 모습으로 가지를 뻗어나가게 된다. 자연이 보여주는 엄청난 자기증식력처럼, 돌연변이까지도 생성해내는 힘처럼 소영란의 풍경에는 존재들이 뿌리를 박고 나무로 성장하여 가지를 뻗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번 청주 시립미술관의 전시에 소영란은 전시장 한가운데 회색빛 소파와 낮은 풀들을 심어놓았다. 관객들이 그곳에 편히 앉아 숨을 돌리면 전시장 벽에 걸린 그림들이 그들 눈높이에 맞춰져 있음이 지각된다. 그리고 이 풍경회화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둘러싼 천연의 자연이 된다. 앉은 자리에서 편안하게 관객들은 이쪽저쪽 캔버스의 이미지들을 큐브 맞추듯이 자유롭게 재조립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 기억 속의 또 다른 풍경을 소환하여 작가의 감각에 자신의 감각을 더할 수 있다. 눈앞에 가까이 마주했을 때 어쩌면 우리를 불안하게, 강렬하게 압도하던 그림들이 앉아서 감상할 때는 우리를 품는 고즈넉한 풍경으로 경험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이 풍경 속의 한 존재로, 작은 점으로 변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 한의정(미학, 충북대학교 교수)​